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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산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박준

by 행복 수집가 2022. 11. 8.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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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산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박준

 

[에세이/산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박준



번호: 79
작가: 박준
출판사: 난다
카테고리: 에세이/산문

쪽: 192
완독일: 2022/10/30

🌟/5: ⭐️⭐️⭐️⭐️

💬
시처럼 산문처럼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나는 편지들이 궁금해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보았다. 한참을 읽어보다 조금 엉뚱한 대목에서 눈물이 터졌다. 1998년 가을, 여고 시절 그녀가 친구와 릴레이 형식으로 주고받은 편지였는데 “오늘 점심은 급식이 빨리 떨어져서 밥을 먹지 못했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10여 년 전 느낀 어느 점심의 허기를 나는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것으로 편지 훔쳐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눈물을 참다가 더운 육개장에 소주를 마시고 진미채에 맥주를 마시고 허정허정 집으로 들어가는 기분, 그리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터져나오던 눈물을 그들에게도 되돌려주고 싶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여행과 생활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당신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한 줄)
그러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먼 시간은
당신에게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나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나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아이들의 낙서로 가득한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작게 적어두고 그곳을 나왔다.

광장의 한때
누구인가를 만나고 사랑하다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엇인가 모르는 구석이 생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세계 속에서 자라는 상대가 점점 울창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이것은 내가 상대의 세계로 더 깊이 걸어들어왔다는 뜻이다.
단칸방, 투룸, 반지하, 옥탑 혹은 몇 평이라고 말하며 우리들의 마음을 더없이 비좁게 만드는 현실 세계의 공간 셈법과 달리 사랑의 세계에서 공간은 늘 광장처럼 드넓다.
이 광장에서 우리가 만나고 길을 잃고 다시 만나고 헤어진다.

시를 짓는 일이 유서를 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아마 이것은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이 때문일 것이고 이 숱한 사라짐의 기록이 내가 쓰는 작품 속으로 곧잘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
시인이 쓴 산문집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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